신학을 재발견해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총을 부각했다. 특히 칼뱅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선하는 역할을 강조하면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이중적 예정을 강조했다. 칼뱅의 신학은 성찬론과 예정론을 제외한 많은 부분에서 루터의 신학과 비슷하다.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 그리스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확산되어 19세기 말엽에는 장로교회의 전파와 함께 한국에도 칼빈이 소개되고 그의 신학과 교회개혁의 이상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런 칼빈의 가르침과 칼빈주의의 역사적 지리적 확산을 고려해 본다면 칼빈이 교회와 사회에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루터의 학교이념은 여러 가지 점에서 루터 이전의 학교 이해와는 구별되는데, 가장 큰 특징은 그가 학교의 주체를 ‘교회’에서 ‘국가’로 옮긴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학교 이념을 바탕으로 루터는 언어와 7자유과를 중심으로 교육하도록 했는데, 언어는 일차적으로 성서를 읽고 이해하기 위해 필요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라는 의미에서 구약 시대에는 아직 신앙이 확인 되지 않은 어린 아이에게도 할례를 시행했는데, 이것을 본받아 개혁주의 역시 유아 세례를 기독교 가정 내에서 시행하는 것을 동조한다.
-침례교
침례(세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위로
프랑스 작가가 된 라블레, 예수회를 세운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등과 동문수학했다. 문학석사를 받은 뒤 아버지 제라르는 칼뱅을 오를레앙대학교에 보내 개혁적인 법학자인 피에르 드 레스투알 문하에서 법학을 더 공부하게 했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부르주로 가서 유명한 이탈리아 법학자 안드레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교회를 자기의 몸 곧 성도의 무리(communio fidelium 또는 sanctorum)를 구성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개념이다.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다른 어떤 교리보다도 앞선다. 그들에 의하면, 교회는 성경을 산출하는 도구이므로 성경보다도 앞선다고 말한다. 또한 교회는 모든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수여해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인간이 묻는 불안한 질문에의 대답이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란 기독교의 품안에서 복음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사상과 삶의 태도인 것이다.
1. 개신교의 기초 : 성경
흔히 개신교가 전통을 무시했다고 하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개신교는 교회의 전통이 복음의 근본적 진리를
교회론을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특별히 루터와 칼빈은 종교 개혁의 선두 주자로서 그들이 내세운 교회론이 지금 오늘날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비스(PaulD.L.Avis)는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에 있어서 교회 라는 저작에서 루터와 칼빈을다음과 같이 대비시켰다. 루터는
교회에 위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아는 종교 개혁자 루터라든가. 멜랑히톤, 에라스무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을 따라 한 위대한 인물이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칼빈이었다. 칼빈은 본래 프랑스 북쪽 피카르디 지방에 있는 노욘이라는 작은 마